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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한화케미칼61년 제주도민과 함께 닦은 5.16 일주도로

     
     
     
    1961년 제주도민과 함께 닦은 5.16 일주도로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인들은 제주도를 어업전진기지로 삼기 위하여 
    어장이 좋은 제주시 한림 서귀포 등지에 집단적으로 이주해 왔고 
    이들의 교통난을 해결하기 위해 1914년부터 해안마을마다 일정구간을 할당하여 
    도민을 부역 형식으로 동원, 길을 정기적으로 보수하기 시작했다.

    1937년부터는 각 면장이 중심이 되어 자력갱생이란 구호 아래 
    마을과 마을 사이의 도로 너비를 주민들의 부역으로 넓히고 굴곡을 없애도록 했다. 
    부역에 나가지 못하면 벌금을 내게 하였는데 
    벌금이 너무 과중해 주민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어떤 마을에서는 주민들의 반반을 진압시키기 위하여 
    경찰관을 동원하기까지 하였다. 
    반발이 가장 컸던 북제주군 조천면은 도로개설조차 하지 못하였다.

    1945년 해방 후 국내 정치 경제 사정이 극히 악화되어 
    도로건설이나 정비에 관심을 둘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자유당 정부 때 이 도로가 제주도의 유일한 산업도로이자 국도라는 점에 비추어
    정비와 교량가설 등을 해나감으로써 일단 도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 도로의 첫 포장공사는 1961년 5.16 혁명 직후인 9월 21일 착공되었다. 
    당시 이 도로의 자동차 통행량이 1일 겨우 300대 미만으로 경제성이 없었으나 
    박 최고회의 의장의 결단으로 포장하기 시작하여 1970년 말까지 
    너비 4m, 총연장 17만 8천여m에 이르는 일주도로의 포장이 완료되었다.

    1971년 1월에 거행된 준공식에서 박 대통령은 
    “이 도로는 제주도민이 8년 동안 돌을 등에 져 나르며 만든 것으로 
    제주도민의 자립정신과 근면, 잘 살아보겠다는 굳은 의지의 결정체”라고 극찬했다.

    1972년 제주도 이승택 지사는 일주도로의 너비가 2차선으로도 좁아, 
    장차 국제관광지로서의 교통량을 수용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하에 
    도로 폭을 7m에서 15m 4차선으로 확장하기로 하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도로에 수용될 토지매입 예산이 막대하여 벽에 부딪치자 이 지사는 
    도로확장을 새마을사업으로 편입시켜 무보상 원칙으로 
    주민 스스로 확장에 필요한 토지를 내놓고 노동력까지 부담하도록 했다. 
    이 사업은 1974년까지 예산 없이 제주도민의 희생적인 노동력 제공
    농지 8천 50필지 36만 평을 무상으로 도로에 편입시켜 완성되었다.

    이와 같은 제주도민의 희생정신과 새마을사업에 크게 감명을 받은 박 대통령은 
    4차선 15m의 포장공사를 국비로서 지원하도록 지시해 
    1979년에 오늘날과 같은 훌륭한 일주도로의 완공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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